첫 직장생활을 대기업 연구원으로 시작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 공대 출신 뿐이었다. 박사 출신마저 수두룩한 그곳에서 공대 출신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박사들조차 난감해 하는 때가 있었는데, 고민했던 내용을 남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자료에 글을 적어야 할 때였다. 연구원이라면 매일 실험만 할 것 같지만, 실험보다 중요한 건 설명과 설득이다. 생각해 보면 일을 하면서 공학용 계산기를 사용했던 시간보다 워드와 PPT에 글을 쓰는 시간이 확실히 더 잦고 더 길었다.
그러다 옮긴 두 번째 직장에서는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스탭 업무를 하고 있다. 나는 그나마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공대 출신 비율이 적다. 동료들은 내가 공대 출신이라는 것에 놀라곤 한다. 친한 사람들이야 내가 뼛속까지 공돌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뭇 동료들에겐 이 직장에서 공대 출신으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퍽 신기한 모양이다.
공대생은 줄글보다 숫자와 수식에 친하지 않을까. 그러나 글쓰기야말로 내 힘이다. 전혀 다른 모습의 두 직장에서 일을 해 오면서도 나름 잘 버틸 수 있었던 건 글쓰기 덕이 크다. 학부 시절 들었던 시쓰기 교양수업에서 글쓰기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학기를 마치고서도 짧게 글감을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했는데, 그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건 몇 년 뒤 입학한 대학원에서였다.
글은 아량이 넓었다. 연구노트에 쓰는 실험 내용도, 연구노트에 다 적지 못한 답답함도, 후배에게 남겨주고 싶은 나만의 노하우도 모두 글에 적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글은 나의 그 모든 것을 받아줬다. 물론 글쓰기가 다 같진 않다. 글감을 메모하는 것과 시를 쓰는 것, 그리고 연구노트를 쓰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장소에 맞게 다른 분위기의 옷을 입는 것처럼 글마다 문장의 내용과 분위기가 다를 뿐이다. 쓴다는 근본적 행위는 동일하다.
공대생이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수식으로 쓰면 간단하고 명료할 것을 뭐하러 글로 풀어 쓸까 싶지만, 우리가 설득해야 할 대상 중 최소 절반 이상은 공대 출신이 아니다. 세상은 수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수식과 수식 사이 행간의 의미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가장 첫발은 자기 자신을 단어로 풀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 무엇이든 글감이 될 수 있다. 마치 뼈를 발라내듯 자신의 지식, 경험, 현실, 감정 등을 단어로 적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다. 그 단어들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는 다양하게 흩어지고 모여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어느새 능동적인 글이 된다.
분명 글쓰기만이 답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소통하며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글쓰기만큼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대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노트북으로 간단히 메모장을 키든, 조금 복잡하게 깃허브에 동기화를 하든 수십 초면 당장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조차 귀찮으면 볼펜으로 포스트잇에 아무거나 휘갈길 수도 있다. 나는 분명 믿는다. 지금 휘갈긴 내용이 아무리 짧고 보잘것 없는 내용일지언정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행간의 의미를 가지고 주인에게 돌아오리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