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티 인스타그램 @writing_han7780
오랜만에 탄 지하철에서 처음 듣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모두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분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합시다.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에게…’라며 탑승객 사이 배려를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비슷한 주제의 방송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힘들지만’ 이라는 단서는 아마 최근에 등장한 것 같다.
모두 어지간히 피곤하구나. 출퇴근 길의 날 선 몸싸움과 짜증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짧은 안내방송은 배려의 의미와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배려의 의미는 내 대학 시절 추억과도 직접 닿아 있다. 150명 규모의 대형 강의인 ‘배려의 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한 학기 동안 이어진 대형 강의 속에서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교우들을 여럿 만나 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우리는 서로 골머리를 싸매고 배려의 가치를 탐구해보려 애썼다.
배려의 정의를 생각해보는 과제에서 ‘자신을 희생해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비슷하게 적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도 배려가 같은 단어로 다가오는지 스스로 되물으니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배려에 담긴 내어줌을 희생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거창한 것 같고, 그렇다고 도움이라고 하기엔 협소하게 느껴진다.
그 강의를 들은 때로부터 이미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내게 있어 배려의 의미는 확실히 삶의 굴곡진 그래프와 함께 변다. 배려는 내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며 힘이 되기도 했고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배려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복잡한 계기를 가진 것 같다.
배려를 개인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위험성이 큰 행동이다. 나의 권리 일부를 내어주어야 하는데 나의 배려가 상대에겐 불편함을 넘어 오지랖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리스크만을 고려한다면 굳이 남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앞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다. 같은 비용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에서 선착순으로 얻은 권리를 애써 포기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가 편하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의 일부이자 주변 사람들과 함께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함께 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나에 대한 배려가 모여 내가 내 권리를 당당히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나같은 개인주의자도 배려를 할 수 있고, 수많은 배려를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 중이다. 작게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부터, 크게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권리 또한 내 권리만큼 소중함을 이해하는 것. 때로는 나의 권리를 조금 덜어서 상대에게 양보하는 이타적인 자세.
그 이타적 행동이 나라는 개인에겐 조금 손해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조금 손해를 보며 나를 배려해 주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나중에 또 누군가가 나를 위해 배려할 테니, 지금 당장 조금은 아쉽지만 나를 내어주며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