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기다리던 택배가 왔는데, 그 안에 슬픔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그 상자를 열어야 할지 의문이 든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필연 시인의 이름 석 자가 아니라 그 깔깔한 느낌의 제목 때문이었다. 누구나 기다리는 택배 속,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슬픔이 들었다. 슬픔이 든 택배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적나라한 모순을 드러내는 제목의 시집 속 세상이 초조하게 궁금했다. 정말로 집어들기 싫은 택배상자인데, 왜 자꾸 열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냉동실서 갓 꺼낸 딱딱한 얼음을 손에 꽉 쥐고있는 듯 했다.
시인이 소화해 보여주는 세상의 깊이는 내가 어림잡을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시집은 얇지만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보통 읽었던 시를 또 읽고 또 읽으며 며칠을 보낸다. 그렇게 아직 다 읽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차가운 손 끝에 시 하나가 낚였다. 제목은 ‘김밥을 먹으며’.
주인공은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막차를 기다렸다. 백화점에다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있는 커다란 동대구역 대합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주인공의 까만 머리는 큰 캔버스에 까만 점 하나 정도 되었을까. 그저 풍경의 일부인 주인공은 작은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김밥을 먹고 있었다. 주인공은 생각했다. ‘힘들다. 김밥 속 단무지같은 게 내 삶에도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지. 김밥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단무지야. 단무지 없는 김밥은 필요 없어.’
인생 속 단무지는 과연 무엇일까? 그 생각을 하는 찰나 주인공의 근처에 남루한 노숙자가 보였다. 세련된 대합실 풍경 구석에도 표현되지 않는 노숙자, 피하고 싶은 역사의 오점같은 노숙자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노숙자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노숙자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여기 앉으세요.”
따뜻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인간미가 적당히 담긴 주인공의 한 마디에 어색한 동석이 시작되었다. 김밥 한 끼를 나눠먹으며 주인공은 노숙자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나도 한 때는 크게 농사 짓는 농부였어요. 근데, 근데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땅도 다 날리고 집도 다 날리고, 갓 고등학생 된 애새끼한테 교복 하나 못 사주는 내 심정이 비참해서 도망쳐 나왔수.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직 그 집에 마누라랑 애가 살고 있을지, 어디서 나처럼 굶고 있지는 않을지. 그 생각만 하면 불안해 죽겠어. 그래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대는 좋겠소, 얼굴 들고 돌아갈 집이 있으니.”
한 때 농부였던 그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주인공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공감하고 넘겨버려도 될, 밑바닥의 밑바닥 이야기인데. 그는 뭔가 마음 속에서 발끈하는 것을 느꼈다.
‘의지도 없는 자식이, 뭐라고? 그렇게 치면 이 세상에 노숙자 안 될 사람이 누가 있어. 나도 시 쓰려고 노숙자 된 심정으로 없는 거 팔아가며 살았다고. 얼굴 들고 돌아갈 집이라니. 누굴 놀리나.’
울컥해 노숙자에게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주인공을 막아선 것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 노숙자의 차림새였다. 노숙자의 신발은 다 해져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거뭇거뭇한 청바지, 대충 껴입은듯한 쉰내나는 티셔츠와 얇은 점퍼. 그리고 근처에 있는 박스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오래된 누빔이불 하나. 그게 노숙자의 짐 전부였다.
주인공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보리수 아래 발우 하나 누더기 하나로 평생 부족함 없이 사신 분도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자에게 화가 나는 것이지? 과연 나는 단무지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일지도 몰라. 그냥 살아가는 것, 주어진 것을 해 내는 것일 뿐인데. 가진 것 때문에 가져야 할 것이 생기고 그 때문에 힘들구나.’
그렇게 주인공과 노숙자, 아니면 마음의 노숙자와 빈곤의 노숙자 둘이서 김밥을 나눠먹으며 깊은 밤이 흘러갔다.
정호승 – 김밥을 먹으며
서울행 막차를 기다리며
동대구역 대합실 구석에 앉아 김밥을 먹는다
김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무지라고
단무지가 없으면 김밥은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다고
밤눈 내리는 동대구역 창밖을 바라본다
노숙자 사내가 말없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내주고 김밥 한줄을 건네며
꾸역꾸역 물도 없이 김밥을 먹는
한때 농부였다는 그의 서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한때 노숙의 시인이었다고
노숙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하려다가 거짓에 목이 메인다
누구는 보리수 아래에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한벌로
평생 부족함 없이 사신다는데
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지닌 게 없다고
오늘 살고 있는 집보다 내일 살아야 할 집 때문에
더 춥고 배가 고프다고
처음 만난 노숙자끼리 말 없는 말을 나누며
우걱우걱 다정히 김밥을 나눠 먹는다
기다리는 기차는 아직 오지 않고
대합실 창가에 눈발만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