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동차를 아주 좋아한다. 세단, SUV, 스포츠카, 심지어 버스와 트럭까지. 자동차가 길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자동차 위에 가격표와 제원표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정말 희귀한 하이퍼카 같은 게 아니라면, 웬만한 자동차에 대한 정보는 쿡 찌르면 탁 나오는 자판기처럼 줄줄 읊을 수 있다.
자동차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3살에서 4살 경이 아닐까 한다. 자동차가 굴러가는 것도 신기했고, 사람이 손과 발을 이용해 운전해서 그 큰 쇳덩이를 움직인다는 것도 신기했다. TV에서는 ‘꼬마자동차 붕붕’을 가끔 방영하곤 했는데, 그 친구는 꽃향기만 맡아도 힘이 솟아나는 효율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한테 가끔 승용차도 꽃향기만 맡으면 힘이 솟냐고 묻곤 했다.
아장아장 유치원을 다니던 5살, 아빠가 갑자기 까만색 중고 각코란도를 데려왔다. 각코란도는 마치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엔진소리를 냈는데, 요즘 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의 소리였다. 2022년의 나보다 어렸던 아빠는 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동기어 운전이 서툴렀다. 언덕길에서 곧잘 시동을 꺼먹곤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시동을 걸고 힘차게 차를 출발시키는 것이 멋져보였다.
6살, 아빠가 각코란도를 폐차하고 캐피탈을 데려왔을 때 처음 타보는 ‘세단’의 맛에 흠뻑 빠졌다. 10살, 아빠가 캐피탈을 폐차하고 누비라2를 데려왔을땐 날아갈 듯이 기뻐서 차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그렇게 나는 나이를 먹어 대학생이 되고 아빠는 아버지가 되었다. 20살, 아버지께서 나 대학 보내주신다고 중동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실 때, 나는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면허를 땄다. 아버지는 수동기어 매니아이시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레 1종 보통 면허를 따고 누비라2를 직접 운전하게 되었다.
누비라2를 가지고 시골 태안에도 가고, 강릉도 가고, 친구들과 드라이브도 다녔다. 그렇게 고마웠던 그 친구도 나이를 먹어 폐차할 수밖에 없었다. 23살, 만으로 꼬박 12년을 채운 누비라2를 보내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렉카에 매달려가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될 다른 차량과의 인연이 기대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계속 해외에 계셨기 때문에 당분간 차량 구매를 보류하다가, 2014년 2월에 코란도C(역시 수동기어)를 구매했다.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면 1년여 시간이 남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일찌감치 임무를 주셨다. ‘차를 계약하고 수령한 다음 길들이기와 초반관리를 해 놓아라. 초반에 어떻게 타느냐가 10년을 좌우한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가서 차를 검수하고 직접 몰고 오며 상태를 체크했다. 임시번호판이 달려있던 차를 가지고 썬팅업체, 블랙박스업체를 돌며 초기 세팅을 마쳤다. 심지어 직접 등록사업소에 가서 번호까지 골라가며 자동차 등록도 손수 했다. 그만큼 초반에 애정을 쏟았던 코란도C는 아버지께서 지금도 잘 타고 다니신다.
2017년 회사에 취업한 뒤 전국 곳곳에 출장을 다녀야 했던 나는 잠깐 아버지의 코란도C를 빌려 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막내 외삼촌께서 11년 된 토스카를 헐값에 넘겨주셔서 1년 조금 넘게 잘 탔다. 무엇보다 토스카의 2000CC 6기통 엔진의 부드러운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물려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온전히 내 차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내 힘으로 산 내 첫 차는 2018년 5월 처음 내 곁에 왔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3세대 i30를 신차로 구매했다. 흔한 차는 끌리지 않았고, 엄청 특이해질 용기와 돈은 없었기 때문에 타협한 것이 국산 해치백이었다. 그 시기로 치면 나름 앞서갔던 빵빵한 반자율주행 옵션과 똘똘하게 잘 돌아나가고 잘 서주는, 기본기에 능한 차였다. 해치백은 SUV와는 달리 무게중심이 낮다. 때문에 운전의 안정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특유의 높은 트렁크 덕에 ‘말도 안 되는’ 적재량을 가진다. 원룸 이사를 할 때, 그리고 55인치 TV를 옮길 때 i30 덕을 톡톡히 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1년 2월 정내미가 뚝 떨어진 회사를 퇴사하고 1년 정도 공기업을 준비했다. 외로운 싸움 동안에도 i30가 나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답답하면 차를 가지고 드라이브를 가고, 장도 보는 소소한 재미들 덕에 지리한 입사지원 기간을 버텨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은 성에 차지 않는 성능과 운전재미 때문에 짬이 나면 다른 차를 알아보곤 했다.
그렇게 2022년 올해. 취업에 성공하고 문득 내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는 i30는 처분한 다음 다른 차량을 구매하기로 했다. 기왕 사는 거 잘 돌아나가고 잘 서는 고성능 모델로. 그렇게 2주 정도 스팅어와 G70과 코나N, 그리고 BMW M135i, M340i 등을 열심히 시승하고 비교하다가 뜬금없이 시승 한번 안 해본 벤츠의 AMG A35를 계약했다. 굳이 이 모델을 선택한 이유는 누군가 계약을 취소한 차량이 있어 후보군들 중에 차가 가장 빨리 나온다는 이유가 컸다. 그리고 나는 매우 속물이기 때문에 삼각별 달린 차도 타보고 싶었다.
이제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썬팅 블박 등록을 하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번거롭기도 해서 판매사원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계약 후 1주만에 차가 나왔고, 시승을 안 해봤다는 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주행감을 받았다. 적당히 작은 크기에 빠른 차는 역시 재미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세단 형태이기 때문에 짐을 실을 때 해치백보다 싣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잘 달리니 됐다.
1주일 전에 첫 사고가 났다. 좌회전 차로에서 차로지시를 무시하고 직진하다가 안전지대로 진입한 차량이, 멀쩡히 가던 내 차의 왼쪽 후방을 들이받았다. 그렇게 내 차는 사고차가 됐다. 욕을 시원하게 퍼붓고 싶었지만 마음에서 멈췄다. 어차피 범퍼카보다 조금 센 충돌이라 병원에 갈 필요는 없었기에 대인 접수는 뺀 채로 수리를 맡기고 렌트를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1주일 정도 팔자에도 없던 E클래스 카브리올레를 타고 있다. 오픈카라니, 별 일이다.
근데 이 아이는 뚜껑이 열린다 한들 내 자동차 역사에 한두 줄밖에 등장하지 않을 친구다. 내 차도 아니고, 애정도 생기지 않는다. 역시 차는 내 일상과 함께하며 두 세개의 챕터 정도는 채워 줘야 비로소 내 동료가 되는 것 같다. 말끔히 수리되어 내 차가 돌아오면 이번 겨울에 마음만 먹었던 강원도 설산 여행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