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품은
아픔과
행복과
기쁨
그 씨앗은
세상을 향한 불빛
사랑과 생명 담긴
시인들의 눈빛
나는 공돌이다. 체크남방을 입은 채 백팩을 매고 있는 전형적 너드(Nerd)에 가까운 외형과 같이, 그 속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긴 글보다는 짧은 수식이 편하고, 미사여구보다는 적분기호(Integral)를 더 아름답게 느끼는 심각한 공돌이. 이과를 나와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을 배우고, 내친 김에 대학원까지 맛봤던 중증 공돌이.
그런 공돌이가 언젠가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 미운 시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인생의 재생목록으로 따지면 삼분의 일 정도에 도달했을까? 이제는 어렴풋한 수능시험 당일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수능 당일 새벽은 몸서리쳐지도록 소름돋았다. 부드러운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따뜻한 집의 온기가 내 잠바 속주머니에 남아있었지만 잠깐이었다. 추운 겨울날 아침 아버지 차의 노란 헤드라이트는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어둠 속을 밝혔다.
시험장은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 꽤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다. 가방을 들쳐메고 3층이었나 4층이었나, 꽤 높은 곳에 위치한 고사실에 들어섰다. 스스로에게 매너를 지킨답시고 가방에 바리바리 참고서와 암기노트를 챙겨갔지만 아마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화이트 아웃, 수많은 생각과 걱정과 긴장 속에서 나는 문제풀이에만 전념해야 했다. 거기서 내 기억은 곧바로 1교시 언어영역으로 건너뛴다.
잘 말하고 잘 쓰고 잘 들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왜 풀드포크 바베큐 속살 발라내듯 글을 뜯어발겨서 문제로 만들어대는지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넘어간다 쳐도, 80분 안에 50개의 문제를 모두 푸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비문학의 긴 지문을 파악하고 문제를 푸는 데도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소설이며 수필이며 시까지, 어렵고 복잡 문학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편안하게 앉아서 읽는다면 초조하지 않았을 텐데, 문제를 풀어나가면서도 매번 아쉬웠다.
다양한 분류의 글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게 느껴졌던 것이 바로 시詩였다. 커피 원두의 원산지와 로스팅 정도를 고르는 것보다도 더, 시는 다양하고 까다로웠다. 산문시에 서정시에 심지어 분류를 나누기조차 애매한 이상의 오감도 같은 시도 시라고 불러야 하나 싶었다. 그쯤 되니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휘갈겨놓고 시라고 우기면 전부 시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결코 편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 시인은 그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과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노래를 부르며 배웠던 동시의 포근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교과서에서 시를 가르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뭇 학생이었지 시인은 아니었고, 시를 쓰겠다는마음이나 목표를 품은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시에 들어간 기교나 운율 그리고 비유와 은유를 필기해가며 외우는 것은 어색하다 못해 폭압적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시가 미웠다.
적어도 한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진.
저도 공돌이 입니다.
시란 원래 공돌이 들에겐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사실 가장 응축되고 엄선된 작가의 정수이고, 읽는이도 파노라마 같은 자신의 일상을
스틸컷처럼 응축해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접하기가 늘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요새는 그냥 읽습니다. 이것저것 안따지고 마음가는대로 한 자 한 자.
그리하면 하늘을 날아갈수 있습니다.
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