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명제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


어떤 존재와 공간이 결합할 때, 쉽게 말해 사람이나 물건이 공간에 존재할 때 그 곳에 비로소 영혼이 깃든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별 의미없이 지나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왠지 나는 그 문장에 사로잡혀 계속 맴돌았다. 그 글에서 말하는 영혼은 결코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텅 비어있는 공간에는 어떤 물건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하여튼 독립적인 존재가 놓인다. 그러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 그 공간만이 가지는, 그리고 그 존재만이 가지는 특징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것이 바로 영혼 내지는 이고, 그것은 영속한다.

그 관념을 배경에 깔고, 맨 위의 빨간 명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유는 다양하겠지만, 조금 뭉뚱그려보자면 외로움은 집단에서 동떨어진 느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외로움은 꽤 아픈데, 실제로 몸을 아프게 만든다는 연구결과도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외롭지 않은 삶을 살려고 애쓴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외로움을 해소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떠들고 집에 돌아오는데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경험.

생각을 조금 전진시켜 보았다. 혼자 있어 외로웠고, 같이 있음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다시 첫 번째 문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타인과 나는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었고 영혼을 공유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같은 방에 들어앉아 있으면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히 동일한 지점에 독립적 존재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같은 방에 들어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서로의 시점에는 극히 미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같이 있다고 해서 함께 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체는 모두 외롭다. 더듬이를 맞대 신호를 교환하는 개미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세치 혀로 의견을 교환하는 영장동물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함께 있을 수 없기에,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외로움을 해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이 바쁘고 약속이 많으면 외로움은 어느정도 가려진다. 바쁘게 살았더니 이별로 인한 외로움이 옅어지는 등의 경험이야말로 딱 맞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외로움은 우리 내면의 최하위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막막하다, 게다가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이라고 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잘 느끼고, 잘 데려가야 한다.

그 외로움을,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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