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노력을 들여 많은 것을 시작해놓고,
또다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많은 것을 끊었다.
나는 끊는다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담배나 술처럼 몸에 퍽 영향을 주는 기호식품들이 먼저 떠오른다. 뒤이어 한때는 친밀했던 이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생각난다. 끊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애정 하던 것에 묻어있는 내 마음을 지우는 것도 괴롭고, 애정 하던 것을 뒤에 남겨놓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겹기 때문이다.
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삶을 RPG 게임에 비유하자면 나는 필수 퀘스트도 실패하는 겜알못에 가깝다. 그런데 삶이든 게임이든, 필수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하면 진행이 어렵다. 삶이라는 게임 안에는 선택 퀘스트들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능력치를 올려주면서 레벨 업까지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필수 퀘스트조차 막막했던 나는, 선택 퀘스트의 수락 버튼을 누를 여력이 없었다.
내 주변의 좁은 사회 속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은 필수 퀘스트뿐 아니라 선택 퀘스트들도 놀랍도록 잘 해내는 것 같았다. 남들과의 비교는 자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굉장히 중독적이어서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마음속에선 이미 비교가 끝나 있었다. 그 비교의 결과는 나의 부족한 부분만 강조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나는 외부에서 툭툭 건드리는 자극들이 고통스러웠다.
난 그때, 그 자극들이 정말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게 맞는지 들여다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리기 위해 다른 자극을 덮어 씌웠다. 흡연과 음주는 접하기 가장 쉬운 자극이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은 정말 맛있는 데다가 즐거운 시간까지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온 탓에 자극에 대한 조절 능력을 잃었던 내게 있었다. 나는 담배와 술의 간질간질한 자극에 이끌렸고 몸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탐닉했다. 담배는 향기로웠고 술은 달콤했다. 남대문에 가서 필터가 없는 타르 20mg짜리 담배를 사서 피웠고, 마트에 가서 2L짜리 위스키를 짊어지고 온 다음 맥주에 말아 마셨다.
담배는 20대 중반 즈음 그만 피우기로 결심했지만, 술만은 놓을 수 없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근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이 현실을 바꿔주지는 않았기에 술이 깨고 나면 늘 헛헛했다. 심지어 그 부족한 마음은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계속되었기에, 사람과의 관계에도 탐닉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갉아먹는 관계조차 이어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절하 탓에, 나는 나를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래서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려고 아득바득 노력했다. 밉보이지 않으려 자아를 억누르고 깎아가며 억지 관계를 질질 끌어왔다. 그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도구로 사용되기 일쑤였다.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난 다시 고통 속으로 침잠하곤 했다.
나를 돌아볼 시간 없이 수동적으로 흘러온 삶은 어느새 30줄을 넘겼다. 소주 뚜껑 꼬다리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멀쩡했던 꼬다리는 견디지 못하고 어느새 뚝 꺾여나간다. 외부의 자극은 나를 마치 그 꼬다리와 같이 흔들어댔다. 결국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간신히 먹고살 만큼 돈을 모으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를 포함한 모두가 나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 불취업 시대에 멀쩡한 직장을 그만뒀다는 이유였다. 강원도에 가서 배추농사나 지으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쉬었던 약 1년 덕에 배추를 솎듯 내 삶을 솎아낼 수 있었다. 과연 내가 어떤 이유로 술과 악연을 탐닉했는지 깊게 생각해 보았다. 핵심은 삶의 무게중심에 있었다. 내 삶의 무게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바깥 어딘가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좋은 것과 내가 싫은 것을 바라보기보단 남이 좋아하는 것과 남이 싫어하는 것에 집중했다.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남에게만 집중하니 주변의 모든 자극이 무겁고 아프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재발견하려 노력했다. 여기에 더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 내 마음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좋아하는 것이 정말 많았음을 다시금 깨달았고, 그렇기에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이겨낼 힘을 지녔다는 것도 발견했다.
아침 일찍 깨끗이 세차를 하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가볍게 로스팅된 커피를 마시고,
잠깐 코인 노래방에 들러 노래를 연습하고,
낮잠으로 피로를 달래고,
카메라를 챙겨 차에 올라 바닷가로 떠나는 것.
내가 이 모든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 애정을 되찾고 나니 놀랍게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렇게 삶에 대한 끈기를 찾은 나는 술도 끊고, 악연도 끊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삶에 대한 끈기가 이제야 생긴 것을 보면
난 참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도 짊어지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