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사람과 윗사람.
평등한 사회라지만 사회생활에는 명확한 계급이 존재함을 느낀다. 계급에 명칭은 없어도 연륜과 직급을 기준으로 계급이 나뉘는 것 같다. 이는 대충 뭉뚱그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난 이 이분법적인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마음가짐도 갇혀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 뿐일까, 어렸을 때라고 해서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힘이 더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심지어는 선생님과 학생, 부모님과 자녀까지.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들 중 계급 중립적인 단어는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우린 수많은 이분법 속에서 살아왔다.
계급 타파를 외치는 계급 신봉자.
난 그 명확한 거리감에 대해 반항한다. 그런데 단지 계급에 반항한다고 해서, 날카로운 단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짚어보면 납득되지 않는 권력의 압박은 갓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에게도 찾아왔다. 손톱을 짧게 자르지 않았기에 선생님께 손등을 꼬집혔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대단한 힘도 권력도 아닌 것이 나를 압도하곤 했다.
부모님의 체벌, 일진들의 횡포, 선생님들의 이유 없는 기합, 교수님이 집어 던진 서류, 상사의 무능하고 무례한 업무지시. 이런 일들은 하나하나 내 마음에 쌓여 계급에 대한 단단한 반항심이 되었다. 이 마음의 끝자락에는 어두운 내면이 존재했다. 아랫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본능, 거기에서 비롯된 정복심이었다.
왕관을 쓴 그대여, 고개를 가눌 수 있겠는가.
자리는 왕관에 비유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많은 권한을 누리는 자, 그의 행동에 그의 진가가 묻어난다 생각한다. 무거운 왕관을 씌웠을 때 견디긴 커녕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 단지 본인의 성취를 위해 그 왕관을 뽐내기만 하는 주변의 윗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멀리 안 가도 근처에 한 명 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기 보다는 자리가 사람의 민낯을 벗겨내는 것 같다. 책임감을 가지고 큰 권한을 담대하게 활용할 때 주변을 이롭게 하는 추진력이 됨을 믿는다. 나는 그래서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을 넘어서고 싶다. 오히려 강인하고 자유롭게 고개를 가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침없는 아랫사람과 깍듯한 윗사람.
얼마나 아픈가, 책임감 없는 왕관들 때문에. 날것의 정복심을 다듬어 그들의 무책임함을 다뤄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조금은 거침없어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윗사람들의 권한에 거침없이 깍듯함을 요구했다. 사회적으로 코흘리개나 다름 없는 작디 작은 내가 반발한다고 해서 왕관이 벗겨지진 않을 테다.
그러나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삶이기에 우리는 결코 아랫사람으로 남지만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또한 거침없는 목소리 끝에 깍듯해질 필요가 있다. 계급이 시스템을 구성해 사회를 이끈다면 그 속에서의 거침없는 목소리는 변화를 이끈다. 계급에 깍듯한 책임감을 부여하고 사회와 개인에 이롭게 동작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나와 여러분이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