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만 봐도 이해될 정도라는 말은

나는 연구자가 아닌 직원으로서 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무리 직원 입장으로 대학에서 일을 하지만 자꾸 해묵은 대학원의 추억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세상 자신감 넘치는 햇병아리 학부생들과 겸손 그 자체인 랩노예 대학원생들의 대조되는 생활을 바라보고 있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학부라는 울타리는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지만 그것도 졸업 전까지다. 대학원생이 되는 순간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경쟁을 해야 한다.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최상위권 배경을 가진 학부생이라 해도 새로운 분야를 파고드는 데 필요한 자산인 키워드만큼은 뭇 대학원생을 앞서기 어렵다고 본다.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자들은 하나의 연구분야 안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연구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안테나를 바짝 세운다. 그리고 그 안테나를 이용해 넓고 깊은 정보를 철저하게 수집한다. 여기서 말하는 안테나는 개인적 능력과도 연관이 있어보인다. 얼만큼 인터넷을 잘 검색하는지,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얼만큼 진득하게 교과서를 읽는지 등이 해당될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이고 영향력있는 요소를 찾아보자면, 그것은 바로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에서 그 분야에 뛰어들 준비는 충분히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호기심만 가지고는 정신없이 얽혀있는 덤불을 헤쳐나가기 버겁다. 호기심은 무딘 몽둥이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몽둥이를 열심히 휘둘러 덤불을 걷어내려 하지만 오히려 몽둥이에 질긴 덤불이 얽히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진다. 호기심 가득 무언가를 시작하지만, 무턱대고 시작한 탓에 수많은 정보 앞에서 압도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른 아침 함께 일하는 한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논문을 읽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바쁠 땐 논문에서 그림만 파악하고 넘어갈 때가 많아요.’ 박사님의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게 된다고?’ 물론 사람의 성격에 따라 큰 틀만 이해해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파악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림만 파악해도 논문을 읽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공계 논문은 그림과 도표가 많다. 그들은 논문의 흐름에 알맞게 배치되어 있고 논문의 핵심이 잘 담겨있다. 논문이 제기하는 문제와 해결책, 그리고 해결책을 수행한 결과가 그림 내지는 도표에 모두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논문의 그림을 잘 파악했다는 것은 논문의 중요한 얼개를 충분히 파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박사님께서 논문의 그림만 파악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던 것은 이미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숱한 경험을 통해 수많은 키워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박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정도가 주어진다. 연구중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커리어까지 쌓았다는 것은 이미 그런 자격 정도는 아득히 뛰어넘은 전문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여기부터는 내 추측이지만 박사님은 그 분야에 대해서 쿡 찌르면 와르르 쏟아질 정도로 많은 키워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만 잘 이해해도 논문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자꾸 논문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관점은 우리 일상에도 쉽게 적용되는 것 같다. 집 안에서 쌈채소를 기르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해보자. 그래서 ‘쌈채소 기르기’라고 적당히 넓게 검색을 해 보면 텃밭을 가꾸는 내용이 절반, 베란다에서 기르는 내용이 절반이다. 그러면 베란다에 놓을 만한 화분은 뭐고, 쌈채소에 어울리는 흙은 뭐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생장용 LED등을 설치할지 말지, 고민해야 할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쌈채소 기르기는 그나마 일상과 밀접하고 익숙한 부분인지라 구체적인 고민이 가능한 것 같다. 그런데 뭇 사람들이 접하기도 어렵고 사전지식도 없는 새로운 분야, 이를테면 코딩이라든가, VR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호기심만 가지고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무딘 몽둥이만 들고 새로운 분야를 갑자기 시작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편리한 방법은 관련 분야의 뉴스 기사를 시간의 흐름대로 읽어보는 것이다. 뉴스 기사는 누구나 접근해서 읽을 수 있고 중요한 키워드도 많이 담고 있다. 이제 제목만 봐도 내용이 파악될 정도로 키워드에 익숙해지면 그 키워드를 기반으로 구체적 사례들을 찾아보고 모사해야(따라해야) 한다. 그런 활동은 선순환을 일으켜서 새로운 키워드를 발굴하게 만들어주고, 그 키워드는 더욱 깊고 전문적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렇게 따지면, 키워드는 잘 벼려진 청룡언월도쯤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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