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산길을 걷다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봐 닉, 글을 쓰는데 항상 감정을 가득 담아서 풀어내면 내 맘이 좀 후련해질 줄 알았어.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감정이 쌓일 때가 많아.”
나는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메모장은 내게 어떤 글을 쓰면 좋다고 단 한 번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저 썼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왠지 손끝이 아리고 눈두덩이가 묵직해지는 글이 탄생하기도 했고, 즐겁다 못해 마음까지 깃털이 되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은 글이 뿅 하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던 무에서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묘미이자 내가 글을 계속 쓰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내가 주체적으로 글을 쓴다 쳐도 그 다음에 피어오르는 감정까지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가끔 글을 쓰고 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감정에 빠져들 때가 있는데, 그 감정의 끝에는 결국 해결되지 않은 상황과 잔뜩 소모된 내 정신력만 너덜너덜하게 남는다. 일종의 현자타임이다. 하물며 내 감정도 그럴진대 다른-몇 안되는-독자들의 감정은 더더욱 내가 손쓸 방법이 없다. 한 번 감정의 태풍에 휘말렸다가는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 도무지 어디로 떨어질지를 모르게 되어버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글쓰기에도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아무렇게나 쏟아낸 글(쏟아진 글이라 하자)은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하지만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결국 주워담지 못하는 것은 말 뿐이 아니다. 말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는데,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글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또한 글과 함께한다.
말하는 것에도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글에도 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책임감을 부여하고 싶다. 설령 그 책임감때문에 커서가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릴지라도 내가 꼭 넘어서야 할 산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쏟아진 글들을 보면 낯이 화끈거린다. 참 다행이다. 그래도 내게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