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미인

상대방에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준다. 공감은 그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큰 역할을 지니고 있기에 누구든 신경쓰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적절한 공감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과 배워야 하는 것이 말 그대로 쏟아지는 요즘 세상에서 공감하는 방법까지 배워야 하는가 싶은 것도 사실이다.

공감력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공감력은 기질과 성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질은 타고나는 특성이고 성격은 삶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특성이므로 사람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공감의 기술이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서툴면 서툰 대로, 공감하려는 마음 자체가 아름답다. 그렇게 믿고 싶다.

뭇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독심술은 커녕 사람의 심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심지어 대화의 기술도 평범한, 아니, 오히려 평범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공감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 같다. 나는 언제나 프로 공감러를 꿈꾸며 갖은 노력을 다 쏟지만 헛다리를 짚어 상대를 뜨악하게 만드는 데는 전문가이다.

나는 상대를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자주 착각한다. 갖은 노력을 하긴 하니까. 그에 대한 급부로 상대 또한 나를 충분히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과연 충분한 공감이란 무엇일까? 기준을 잡기 나름이겠지만 충분한 공감이란 아마 같은 상황을 두고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감정의 공유는 섬세하고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서로의 눈빛을 마주친 채 같은 단어로 말하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공감은 이처럼 강력하게 사람을 사로잡아서, 서로의 언어적이고 비언어적인 모든 것을 동기화하는 것 같다.

간절히, 그런 동기화를 가끔이나마 느끼고 싶다. 세상에 와서 지낸 시간이 쌓일수록 세상이 내게 가져다 준 경험도 쌓였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내 시야를 넓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고정관념만을 깊고 공고하게 세우는 것 같다. 역시 예측한 대로 흘러가버리는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쌓아나가며,

상대방에 대한 나의 공감과
나에 대한 상대방의 공감은
갈수록 어려워짐을 느낀다.

오늘은, 아직은,
해결책이 없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