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리고 있는 취미를 점검해 보았다. 취미생활에서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그리고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천천히 살폈다. 그러고 보면 취미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앞선 점검에 비추어 본다면 취미란 오롯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가볍게 누리는 활동 정도로 정리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난 그런 취미를 참 많이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지금처럼 글을 쓰며 내 철학을 손톱만큼 담는 것, 좋은 풍경을 남기기 위해 목디스크 걸릴 것 같이 묵직한 대포알 카메라를 들쳐메고 낑낑대며 언덕길을 오르는 것, 한적한 시골 카페에 앉아 여유를 맞이하기 위해 지도를 억지로 뒤적거려야 간신히 보일락말락한 이름없는 길목에 찾아가는 것. 그것들이 가볍고 즐겁고 곧 내 취미다?
그렇게 믿어왔는데, 아닌 것 같다.
이제서야 깨달은 까닭은
내 자신이 가진 공허함을 솔직하게 마주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은 남에게 내 글을 뽐내기 위해서였고, 사진을 찍는 것은 남에게 내 사진을 뽐내기 위해서였고, 카페에 다니는 것은 남에게 내가 다녀온 곳을 뽐내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다. 남들의 감탄을 자아내기 위해 취미생활을 이어왔음을 도무지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도 격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말이다.
마주하기 두려운 사실이었지만 막상 글에 풀어놓으니 그 모습이 안타깝다. 어째서 나는 뽐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일까? 그 물음이 몰고 온 밀물에 바스라질 모래성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 자아는 파도에 휩쓸렸고,
모래성은 알알이 흩어져 거품에 섞였다.
형태 없이 하얗게 흔들리는 거품 속에서 어린 내가 보였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 것은 곧잘 했다. 독서와 공부를 즐기는 조용하고 우직하고 성실한 아이; 속된 말로 범생이였다. 여기에 더해 예술적 감각이 없진 않아서 글쓰기도 그림도 악기도 별다른 연습 없이 그럭저럭 해 냈다. 하지만 여린 심성을 가진 샌님같은 나는 웅크린 채 노트를 끄적거리다 지우개 미사일을 맞거나,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교과서를 도둑맞기 일쑤였다.
힘센 아이들은 책상머리가 없었고 나는 책상머리가 있지만 힘이 없었다.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까, 어느 새 나는 잘난 척 하는 아이로 여겨졌다. 그래서 힘센 아이들 앞에서 겸손하게 구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범생이는 겸손했지만 그럼에도 잘난 척하는 웃자란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나를 고깝게 봤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하면 칭찬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두드려 맞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아프지 않게 하루를 보내려 노력했고 이는 나를 점점 음침한 공부벌레로 만드는 악순환의 원동력이었다.
공부벌레로 침잠하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적당한 능력과 적당한 사회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는 밝은 세상의 인간상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소굴 속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아버린 벌레에게 밝은 세상은 너무나 눈이 부셨다.
공부벌레는 적당함을 동경했지만 부족한 사회성을 채울 방법을 몰랐다. 맞아가며 악이 받쳤고, 뛰어난 능력으로 승리하고자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을 티내면 또다시 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다른 전략을 세웠다. 공부 말고 잘 하는 것을 만들자. 결국 내 취미는 이 그릇된 정의에서 출발했고 취미를 즐기면 즐길수록 공허함에 빠지는 원인 또한 여기에 있었다.
이기려고 취미를 하기에 공허하다. 아마추어는 프로를 넘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은 것 같다. 업으로 하는 사람과 맛만 보는 사람 사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결국 취미생활이 가져오는 패배감은 갖은 노력과 시간과 돈을 들인 것을 아깝게 만든다. 내가 좋아서 한 행동이 아깝게 느껴지는 심각한 상황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이상한 가정을 시도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도
나는 그 취미를 즐길 것인가.
잘 한다는 의미조차 희미해지는 상황이다. 내 필력이나 사진 실력을 원숭이나 길고양이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없고, 사진을 감상해 줄 사람이 없고, 예쁜 카페는 고사하고 허물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과연 내 취미생활은 건재할까?
지금은 등이 따숩고 배가 불러서 이 명제가 꽤 만만해 보인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나 혼자가 되면 나는 취미를 내팽개쳐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뽐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겨야 의미가 있는 취미, 결국 나는 지금 취미를 오롯이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모두가 사라질지라도, 나는 취미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취미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겨야 할 것 같다. 일단 지금 재미있으면 되고 지금 뿌듯하면 그만이라는 단순함과, 언제나 즐겁고 뿌듯하지만은 않다는 불균형이 가져다 주는 홀가분함. 나는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겨먹으려고 노력하는 사회성 결핍 공부벌레다. 그럼에도 사실 꽤나 자주 글이 성에 차지 않고, 자주 똥손이 되고, 자주 카페를 잘못 고른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잠깐 웃음이 피어올랐다.
언젠간 공부벌레에서 탈피하고 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고 싶다. 반짝이는 별은 이기려고, 빛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 내 취미가 그 연료로 쓰일 수 있길.
잘 읽고 갑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어도 나는 이걸 할 건가?” 어떤 활동을 자랑 하려고 하는지 온전히 내가 즐거워서 하는지 체크하기 위한 좋은 가정법인 듯 합니다. ㅎㅎ
댓글 감사드립니다. 읽어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저도 힘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