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밤.
누런 가로등 몇 개만이
간신히 길을 비추려 노력하고 있는
어두운 시골 국도를 달렸다.

1. 밤길

전조등 레버를 상향등 쪽으로 한껏 밀어봤지만 쓸모가 없었다. 변변한 가드레일도 제대로 서있지 않은 시골 국도는 어둠 위에 두려움까지 얹어왔다. 내 차의 상향등은 대답 없는 메아리마냥 무거운 어둠에 가로막혀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때 멀리 흔들리는 불빛 두 개가 보였다. 반대편 끝에서 나를 향해 불빛을 비추며 열심히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찌릿하게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긴장감은 이내 반전되어 따뜻한 안도감이 되었다.

낮이었다면 반대편의 차는 그저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늦은 밤 외롭고 어두운 길목에서 두 대의 차량이 서로를 향해 빛을 밝힌다는 것은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헤드라이트를 한껏 비추며 서로를 위해 캄캄한 어둠을 잠시나마 몰아냈다.


2. 흑막

반대편의 차량이 내 곁을 스쳐가며 흩뿌린 눈부심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어둠 속에서 허겁지겁 뭐라도 찾아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밝은 불빛에 적응해버린 내 눈은 시야에서 암흑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찰나, 나는 암흑 속에서 나의 삶-
막막하게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떠올렸다.

어둠이 내린 바다는 흑막이자 심연 그 자체였다. 바람 따라 일렁여야 하는 물결도 저 멀리 펼쳐져야 하는 수평선도 어둠 속으로 혼탁하게 녹아들었다. 그 어둠 끝에 거만하게 턱을 괴고 있던 두려움은, 두려움 그 녀석은, 나의 마음 구덩이 깊은 곳에 꼭꼭 잠가 처박아 둔 아픈 기억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냈다. 잊으려 노력했던, 악연이나 진배없던 그 아픈 기억들을 먹이 삼아 되살아난 냉정한 공포는 순식간에 내 몸을 휘감았다. 바다의 심연이 가져오는 공포 앞에서, 흔해빠진 시골 국도 따위는 애기들 장난이었다. 

작은 통통배 따위에 매달린 호롱불 같은 전조등 하나에 의지해 어둠에 삼켜진 바다 위에서 항해하는 무모한 짓은, 내게 있어 삶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내가 타고 있는 작은 통통배는 흔해빠진 풍랑이라도 일면 출렁, 출렁,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흔들려댔다. 나는 아픔으로 점철된 10대와 20대를 보내며 도대체 내가 어디쯤 온 건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공포에 떨었다.

나는 싫어도 그 통통배의 선장이었다. 눈물이 녹물처럼 눌어붙은 누더기 통통배가 느릿느릿 불쌍하게 어둠을 헤쳐나갔다. 겨우 한 뼘 앞이나 밝힐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전조등에 비해, 사방천지 드리운 어둠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어둠과 함께 바닷속으로 삼켜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통통배의 숨을 옥죄었다.

항해를 그만둘 것인가 생각해봤지만 지금 그만하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지금까지 견뎌 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만둘 수 없었다. 방법은 모가지에 힘을 넣어 고개를 돌리고 수평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 딱 하나뿐이었다. 그 혼탁한 어둠 속 수평선을 바로 볼 것, 그리고 나의 갈 길을 바로 세울 것.

바로 그때 나는 수평선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발견했다. 희미한 변광성은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별이라기에 그 불빛은 꽤나 또렷했고 규칙적인 주기로 깜빡였다. 불빛은 너무 멀리 있어서 어느 정도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거기에 그 불빛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3. 희망

그 주기적인 불빛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나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긴장감은
이내 반전되어 따뜻한 안도감이 되었다.

소중한 이들이 나를 위해 쌓아 올린 등대가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몰아낼 정도로 강인했다. 그들 모두는 멀리서 나를 향해 응원의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 그 순간, 나와 그들 사이를 가르는 시간의 바다는 이미 너무 넓고 깊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내가 항해를 막 시작하던 때도 먼바다에 나와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들이 나를 위해 불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쉼 없이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던 그 등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난 어둠 내린 바다가 무서웠고, 그래서 한 뼘짜리 전조등에 눈을 딱 붙이고 수평선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등대의 불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두려운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려 희미한 수평선을 바로 쳐다본 그 순간, 결국 희망 없어 보였던 막막한 바다 끝에서 깜빡이는 유일한 희망의 등대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렇기에

진짜 항해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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